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실험의 본질 – 데이터가 아닌 ‘이해’를 얻는 과정 본문
‘성공한 실험’이란 무엇인가
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를 계속하면서 나는 종종 “오늘 실험 성공했어요”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대부분의 실험은 우리가 기대한 그래프 모양이 나왔는가, 밴드가 떴는가, p-value가 유의한가로 평가된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성공일까?
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실험 결과를 통해 메커니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가에 있다.
즉, 결과가 예상과 달라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실험’이다.
데이터는 그저 결과물일 뿐, 과학자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탐구하는 사람이다.
나를 소개할 때, technician, researcher 보다 scientist라고 자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실험은 ‘관찰’이 아니라 ‘질문’이다
실험의 출발점은 ‘이 현상을 어떻게 재현할까?’가 아니라
‘이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무엇을 물어볼까?’이다.
연구 초년생 시절, 나는 세포를 다루며 “왜 이번엔 transfection 효율이 떨어졌지?”라는 질문을 자주 던졌다.
이건 요즘도 팀원들을 가르칠 때 자주 던지는 질문이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왜’보다 ‘어떻게 다시 맞출까’에 집중했다.
즉, 문제를 해결하려는 엔지니어의 태도였지, 원리를 탐구하는 과학자의 태도는 아니었다.
좋은 연구자란 문제의 원인을 기술적으로 복구하는 사람을 넘어,
그 원인을 통해 현상을 더 깊이 이해하고 다음 실험을 설계하는 사람이다.
실험은 통제의 예술이다
생물학 실험은 늘 수많은 변수를 안고 있다.
세포주의 passage number, 배지의 serum lot, pipetting 속도까지
작은 변수 하나가 결과를 크게 바꾸어 놓는다.
그래서 실험의 본질은 변수를 통제하는 예술이다.
하지만 완벽한 통제는 불가능하다. 사람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모든 변수를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어떤 변수가 가장 큰 영향을 미칠지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설계하는 능력이다.
즉, “모든 걸 일정하게 유지하자”가 아니라
“무엇을 바꾸면 본질적인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까”를 고민해야 한다.
‘재현성’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다
요즘 연구계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 중 하나가 "reproducibility(재현성)"다.
하지만 재현성은 단순히 SOP를 따르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실험자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노트에 기록된 reagent lot, 정확한 pipetting 시간, 세포 상태 등은
모두 “내가 이 실험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있다”는 책임의 언어다.
즉, 재현성은 기술적 능력보다 정직한 기록과 사고의 일관성에서 나온다.
데이터는 결과가 아니라 ‘언어’이다
많은 연구자들이 데이터 해석에서 가장 많이 놓치는 부분이 있다.
바로, 데이터는 결론이 아니라 현상이 말하는 언어라는 점이다.
그래프는 자연현상이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다.
그래서 실험 데이터는 “증명”이 아니라 “번역”이다.
과학자는 이 언어를 해석하는 번역가이며,
그래프의 형태보다 그 배후의 논리를 읽는 능력이 진짜 실력을 만든다.
실패에서 배우는 사람만이 진짜 연구자다
실험은 실패하기 위해 존재한다.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실패를 통해 가설을 수정하고, 변수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실험은 수십 번 반복해도 결과가 어긋난다.
그럴 때 중요한 것은 “왜 안 됐는가?”가 아니라
“이 실패가 내 가설의 어떤 부분을 흔들었는가?”이다.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순간, 그 실패는 이미 성공의 일부가 된다.
마치며 – ‘데이터를 쫓지 말고, 원리를 추적하라’
과학자는 데이터를 모으는 사람이 아니라 진실을 추적하는 사람이다.
데이터가 예쁘지 않아도, 가설이 틀려도 괜찮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실험의 결과를 통해 세상을 조금 더 명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결국 실험의 본질은 ‘성공’이 아니라 이해의 확장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새로운 데이터를 얻기보다 새로운 질문을 찾기 위해 실험실로 간다.
✍️ 연구자의 메모
“좋은 실험은 데이터를 남기지만, 훌륭한 실험은 통찰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