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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

피렌체에 도착한 날, 하늘은 맑았고 공기에는 대리석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기차역을 나서자 붉은 지붕이 끝없이 이어지고, 그 사이로 두오모의 거대한 돔이 솟아 있었다.마치 도시 전체가 하나의 예술 작품처럼 정교하게 구성된 풍경이었다.피렌체는 ‘보는 도시’가 아니라 ‘느끼는 도시’였다. 걷는 한 걸음마다 르네상스의 숨결이 묻어 있었다. 두오모—하늘을 향한 인간의 꿈피렌체의 중심,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거대한 붉은 돔은 도시 어디서나 보였다. 브루넬레스키가 남긴 건축의 정수는 그 자체로 인간의 가능성을 상징했다.계단을 따라 돔 위로 오르는 길은 끝이 없을 만큼 길었지만, 꼭대기에 도착해 도시를 내려다보는 순간, 숨이 멎었다.붉은 지붕 바다 위로 알록달록한 창문과 종탑이 어우러져 있었다. 피렌체의 하늘..
1. 밴드는 결과가 아니라 ‘기록’이다Western blot을 처음 배울 때, 대부분의 연구자는 “밴드가 잘 나왔는가”에 집중한다.그러나 숙련된 연구자는 밴드보다 샘플의 상태를 먼저 본다.Western blot은 단백질 발현을 보는 실험이 아니라,세포나 조직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기록하는 기술이다.즉, 밴드는 ‘결과’가 아니라 ‘세포의 생리학적 기록’이다.그 기록을 얼마나 정확히 보존하느냐가 Western blot의 핵심이다.2. Lysis buffer는 “해부도구”다세포를 lysis할 때 가장 많이 쓰는 문장이 있다.“RIPA buffer로 단백질을 추출한다.”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어떤 buffer를 쓰느냐보다, 어떤 단백질을 보고 싶은가다. Buffer 종류 특징 추천 용도 RIPA강력한 ..
이탈리아 남부는 단순히 지도 위의 공간이 아니라, 햇살과 바람이 만든 감각의 풍경이었다.로마에서 내려와 만난 나폴리, 폼페이의 돌길을 걸었고, 아말피의 절벽에서 바다를 마주했다. 그리고 그 끝에는 포지타노가 있었다.이탈리아 남부의 길은 늘 햇살로 시작해 바다로 끝난다.절벽 위의 마을, 바다를 향해 기울어진 색채의 도시. 나는 그곳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도시는 역사가 아니라 현재의 호흡으로 나를 맞았다. 남부에서 보낸 며칠은 “천천히 사는 법”을 배우는 시간이었다. 1) 나폴리—혼돈 속의 리듬나폴리에 첫발을 디디자마자, 사람과 소리와 냄새가 폭발하듯 쏟아졌다.좁은 골목길을 메운 스쿠터, 하늘을 가리는 빨래줄, 시장을 가득 채운 상인들의 목소리.처음엔 복잡하고 산만했지만, 곧 이 도시의 리듬이 있다는 ..
Transfection은 ‘전달’이 아니라 ‘협상’이다많은 연구자들이 Transfection을 “세포에 DNA나 RNA를 넣는 과정”으로 단순하게 정의한다.하지만 실제로 이 과정은 세포와 외부 물질 간의 협상(negotiation)이다.세포는 외부로부터 오는 분자를 본능적으로 “침입자”로 인식한다.따라서 Transfection은 세포의 방어 기전을 피해 ‘받아들일 만한 형태로 정보를 전달하는 기술’이다.즉, 핵심은 reagent의 효율보다 세포가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다.효율 높은 reagent보다 중요한 건, 세포의 상태(대사, 성장 단계, 스트레스 레벨)다. Reagent, Viral — “전달”의 두 가지 언어세포내에 DNA나 RNA를 전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방법 원리 특징 예시 ..
세포 배양은 ‘살아 있는 생명체 관리’다세포 배양(cell culture)은 단순히 “배양기 안에 세포를 키우는 과정”이 아니다.그건 하나의 생명체를 환경에 맞게 조절하는 섬세한 생태학적 실험이다.세포는 항상 같은 유전자를 지녔지만,그 표현형은 우리가 제공하는 "환경(온도, pH, serum, CO₂, passage)"에 따라 달라진다.즉, 같은 세포주라도 다른 연구자의 손에서 전혀 다른 세포가 된다.세포 배양의 핵심은 therefore 단순한 “증식”이 아니라‘실험에 적합한 상태의 세포’를 준비하는 과정이다.Passage number는 세포의 ‘나이’다많은 초보 연구자들이 passage number를 단순히 “숫자”로만 본다.하지만 이는 세포의 생물학적 나이를 나타내는 지표다.예를 들어, HEK293이..
‘성공한 실험’이란 무엇인가박사 학위를 받고, 연구를 계속하면서 나는 종종 “오늘 실험 성공했어요”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대부분의 실험은 우리가 기대한 그래프 모양이 나왔는가, 밴드가 떴는가, p-value가 유의한가로 평가된다.하지만 과연 그것이 진짜 성공일까?진정한 의미의 ‘성공’은 실험 결과를 통해 메커니즘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는가에 있다.즉, 결과가 예상과 달라도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실험’이다.데이터는 그저 결과물일 뿐, 과학자는 왜 그런 결과가 나왔는지를 탐구하는 사람이다.나를 소개할 때, technician, researcher 보다 scientist라고 자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실험은 ‘관찰’이 아니라 ‘질문’이다실험의 출발점은 ‘이 현상을 어떻게 재..
바이오 신약 개발 회사에 몸담고 있는 N년차 박사가 들려주는 신약 개발 이야기 29.1. 신약은 생명을 구한다… 그러나 누구의 생명인가?신약은 단순한 치료 수단을 넘어 인류의 생존과 삶의 질에 직결된 혁신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그 약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전 세계적으로 출시된 신약 중 상당수가 고소득 국가의 만성질환, 희귀질환, 항암 분야에 집중되어 있다.이는 시장성 중심의 투자 구조 때문이다.개발비 회수를 위해 가격은 수천만 원, 심지어 수억 원을 넘는 경우도 많다.결국 저소득국가, 또는 건강보험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은 이 혁신의 혜택에서 배제되곤 한다.2. 희귀질환·소아질환은 소외되는가?신약은 시장이 아닌 사람을 위한 것이다.하지만 현실은 희귀하거나 경제성이 낮은 질환에 ..

로마에 도착한 날, 공항 문이 열리자마자 공기에 스며든 라벨 향과 뜨거운 흙냄새가 먼저 나를 맞았다.택시 창밖으로 흘러가는 전나무의 실루엣, 붉은 기와지붕, 어두운 돌담의 그림자까지도시는 오래된 영화의 오프닝처럼 천천히 초점을 잡아갔다.“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이곳의 길은 결국 시간을 향해, 혹은 시간을 거슬러 흐르고 있었다. 1) 콜로세움—시간의 균열에 서다아침의 로마는 의외로 고요하다. 콜로세움 역에서 지상으로 올라오자 첫 빛을 받은 아치가 금빛으로 깜박였다.거대한 타원형의 벽면은 수천 개의 긁힘과 균열로 가득했는데, 정작 그 상처들이 이 건물을 더 단단하게 보이게 했다.나는 손바닥을 차가운 돌에 대고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함성과 피, 모래 먼지와 쇠사슬 소리. 책에서만 ..